신림선이 개통한 지 어느덧 5개월 가량 되었습니다. 신림선 역들 중 과거 고시촌, 녹두거리었던 이 동네 일대에 신설된 역 이름은 '서울대벤처타운역'이었습니다. 과연 이 동네는 고시촌에서 역 명 대로 벤처타운으로 새롭게 변모했을까요? 호기심에 이 동네 일대를 찾아가 봤습니다.

신림선 서울대벤처타운역에서 출발합니다.

신림선을 처음 타본 느낌은, 커브구간이 많은 데 비해 생각보다 조용합니다. 똑같이 큰 커브 구간들이 있는 1호선이나 수인분당선과 비교하면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반면, 손잡이를 반드시 잡아야 할 정도로 덜컹거림은 심한 편이었습니다. 찾아보니 고무차륜열차의 특성(https://tbs.seoul.kr/news/newsView.do?typ_800=3&idx_800=3471509&seq_800=20464148)이라고 하네요.
지하철 바퀴가 고무타이어? 서울 제2호 경전철 '신림선' 탑승 취재기 [기자강림] | 서울특별시 미
지하철 바퀴가 고무타이어? 서울 제2호 경전철 '신림선' 탑승 취재기 [기자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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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삼성동 일대로 갑니다. 삼성동하면 대부분 네임드인 강남구 삼성동을 떠올리는 아픔이 있는 동네입니다. 삼성동은 삼성산 아랫 자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 돌아본 세 개의 동은 모두 산을 끼고(삼성동-삼성산, 대학동-관악산, 서림동-청룡산) 있습니다. 산 밑 마을의 맑은 공기와 고즈넉한 정취가 느껴집니다. 삼성산이라고 하니 예전에 LG전자가 스마트폰 사업을 하던 시절에 결의를 다지기 위해 삼성산(삼성전자) 꼭대기에서 사과(애플)을 먹는 퍼포먼스를 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생각납니다. 물론 진실 여부는 LG전자 직원이 아니라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삼성동 지역은 신림뉴타운이라는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구역에 비해 1구역은 생각보다 사업 추진이 신속하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마을들의 특성인 이미 이주가 완료된 빈집과 아직 주민들이 살고 계시는 집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전혀 택배함처럼 생기지 않은 독특한 택배함이라 찍어 봤습니다. 자물쇠 번호는 지역을 담당하는 택배 기사님은 알고 계셔야 하는 구조인 듯 보입니다.

이 동네의 특징 중 하나는 체감상 교회가 정말 많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종파와 규모는 전부 제각각이라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조성되는 신도시에 가면 중앙에 큰 교회만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구도심의 교회들을 보면, 과거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서울의 야경엔 십자가가 정말 많다고 한 것이 헛 말이 아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원신길이 관통하는 삼성동시장 쪽으로 나옵니다. 구도심의 재래시장이 으레 그렇지만, 이 시장은 다른 시장들보다도 더욱 시간이 멈춘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도로 양 옆에 세월의 흔적을 알 수 있는 1층 기와 지붕 건물들이 주욱 들어서 있었습니다. 낡은 느낌이었지만 도로에 풍기는 맛있는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마 맛집 매니아들 사이에 유명한 노포 맛집들이 곳곳에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건물들 사이사이에는 이렇게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오래된 골목들이 보입니다.

시장 안 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신림 2구역 철거구역이 나옵니다. 이 쪽은 1구역과는 다르게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 중인 듯 보입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니 개발 완료 시 입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부동산 업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철거를 코앞에 둔 동네들은 드문 인적, 쓰러져가는 건물들, 그리고 그 옆에 쓰레기들이 쌓여있어 마치 군대가 한 번 휩쓸고 간 전쟁터의 분위기가 납니다.

예전엔 건물에 천막이 쳐져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철골이 전부 휘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저렇게 휠까 싶기도 하며, 사람이 거주하고 손을 타는게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도시에 사람이 떠나고 최소한의 관리를 해주지 않는 순간 폐허처럼 변하는 것은 순식간 입니다. 대한민국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을 표현한 유튜브 영상들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재개발 철거로 인해 더 이상 진입이 불가하여 호암로 근처로 나옵니다. 미림여고가 있는 반대쪽은 대학동인데, 도로 하나를 두고 동네의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삼성동 쪽은 단층 주택이 많은 반면, 대학동쪽은 대학생들을 겨냥한 원룸, 다세대, 고시원 등이 즐비합니다. 도로하나를 두고 동네의 대조가 흥미롭습니다. 아래는 좌측은 삼성동 쪽, 우측은 대학동쪽 풍경입니다.

호암로 도로변에 다양한 의미로(?) 재미있는 가게들이 많았습니다. '영천환경'이라는 가게는 도로 한복판에 지하로 가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아마 자재를 보관하는 창고인 듯 싶은데, 마치 게임속에서 지하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은 느낌입니다. 주인께서 퇴근 후에는 뚜껑을 덮고 가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울 때 취객이나 한눈 팔고 가는 사람이 빠지는 사건 사고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애견용품을 파는 가게입니다. 가게의 양 옆에 철로 만든 반려견 모형들이 보입니다. 처음에 제작되었을 때는 매우 귀여웠을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세월이 지나 녹이슬어서 범상치 않은 비주얼을 자랑합니다. 반려견 보다는 마치 신전을 지키는 동물상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문도 있어서 카메라에 담아봤습니다. 지금 30대 이상 세대들은 어릴 때 저렇게 생긴 문을 열고 닫아본 기억이 누구나 한 번씩은 있을 것 같습니다.

도림천을 건너 서림동으로 갑니다. 이 곳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와 서울대학생들을 상대로한 원룸, 하숙집, 고시촌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쪽도 청룡산쪽으로 가면 만만치 않은 언덕길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엔 '구멍가게'라 불렸던 동네 슈퍼였을 오래된 가게를 찍어봤습니다.

이 동네에도 어김없이 교회가 있었는데, 코로나 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특정 종교인의 출입은 금한다는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눈에 띄게 예쁜 건물이 있어서 찍어봤습니다. '쉐어원 신림'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쉐어하우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인 가구가 늘고 있다지만, 혼자가 편해서 그럴 것이라는 편견과는 달리 높은 주거비 때문에 '비자발적인 1인 가구'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가성비 좋은 쉐어하우스가 탄생하게 된 이유입니다. 물론 사람간의 트러블이 없을 수는 없지만, 어린 나이에 비슷한 또래들과 같이 쉐어하우스에 살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일 것 같습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만 느끼는 단순한 판타지인 걸까요?

흔히 '신림동 주민들과는 법적인 분쟁이 나면 좋지 않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변 지인들 중 법조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곳에서도 기운이 좋은 명당은 존재한가 봅니다. 해당 건물에서 탄생한 합격자들을 플랜카드처럼 걸어놓았습니다.

녹두거리가 있는 대학동으로 나옵니다. 과거 사법고시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정말로 공부하는 고시생들과 사람들로 넘쳐났던 동네 였을 것입니다. 지금은 사법고시 폐지와 샤로수길을 비롯한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가 떠오르며 주요 고객층인 대학생들이 많이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주말에 저렴한 가격대에 한 잔 하러 나온 대학생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 정말 많이 보이는 업종은 스터디카페, 그리고 PC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한 건물에서 마주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없습니다. 1층에서 학용품을 구입해서, 2층에서 공부를 한 뒤, 3층에서 스트레스를 푸는, 모든 것을 한 건물에서 해결할 수 있는 완성형 복합 건물입니다.

관악산 쪽으로 올라가면 역시 가파른 언덕길이 나옵니다. 언덕으로 올라갈수록 상업화된 술집들 보다는 정겨운 동네 가게들이 나옵니다. 방 월세도 언덕일수록 저렴해진다고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원룸 건물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많다 보니,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문구는 쓰레기 투기, 흡연 금지 경고문입니다. 거의 건물마다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이 '한국은 너무 흡연자를 폭력적으로 취급해' 라고 했던 것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얼마나 심했으면 이렇게 많이 붙혀놨을까 싶기도 합니다.

관악산으로 가기 전, 도로 끝까지 올라가면 영등포-여의도쪽 서울시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 있습니다. 밤에 공부하다가 커피 한 잔 들고 이곳에 와서 야경을 보는 맛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정 건물들의 높은 층에 운 좋게 자리잡게 되면 집 창문에서도 '꿀뷰'를 즐길 수 있는 곳들이 곳곳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학동의 또다른 특징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골목들의 특성상 치안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안심 골목길'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가지 방범 시설들이 골목에 있음을 표시하는 표지판 입니다. 이런 언덕길 골목에는 가끔 막힌 길들을 만나 당황스러울 때들이 있는데, 친절하게 막힌 길도 표시해줍니다. 헌데,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안심 골목길 표시가 '얼마나 위험하면 저걸 표시해' 라고 역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다시 서울대벤처타운역으로 복귀하여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 합니다. 역 명에 대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역 명과는 다르게 벤처타운은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못 찾은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만큼 역 명이 뜬금없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사법고시의 폐지로 쇠락한 고시촌을 벤처타운으로 부활시키기 위해 정한 역 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고시촌들이 곳곳에 있는 동네에서, 고시와는 너무나 다른 성격인 창업을 떠올리게 하는 역 명은 현재까지는 이질감이 정말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녹두거리, 고시촌의 색은 점점 옅어지고 있지만, 그 흔적들을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한 풍경들이 인상적인 동네였습니다. 사법고시의 폐지는 단순히 법조계에만 관련된 일이 아니라, 한 지역의 큰 변화를 일으키는 사건이었음이 느껴졌습니다. 앞으로 신림뉴타운과 서울시의 의도대로 벤처타운 등이 완공되면 녹두거리와 고시촌의 풍경이 조금씩 남아있는 현재의 모습도 과거의 기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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